사랑의 발명
나는 꿈이 작가라는 사람과 만나 본 적이 없다. 만나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은 있다. 당신은 작가의 존재 가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다.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작가에게는 존재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작가는 신기한 직업이었다. 말하자면 작가는 발견되었다기보단 발명된 것이다. 이야기꾼의 계보에서 계승된다 가정하고 작가라는 직업을 두고 보았을 때, 작가가 필요한 이유는 보다 즐거운 이야기를 듣고 읽고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앞의 두 가지는 단순한 일이며 마지막 '기억하기 위함'은 중요하지만 여느 작가나 도달할 수 있는 목표지점은 아니다.
그러므로 작가의 일이란 바로 기억되기 위한 글을 쓰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더 우선으로 필요한 조건은 바로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실은 상충하는 두 가지 요소가 부딪히고 있다. 기억되기 위한 글 이란 대개 작가의 기준에서 가해지는 판단이다. 보통 사람들은 작가가 원하는 이야기를 굳이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상업 작품에서만이 이러한 작가가 원하는 글과 독자가 원하는 글의 괴리를 겪는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순수문학 작품 또한 마찬가지이다. 순문학 작가를 양성하는 강의실이나 교실에서는 둘러앉아 서로의 글을 읽으며 평가해 주는데, 그것은 작가와 독자가 밀접하게 부딪히는 부분이며 대개 학생들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서로에게서 거리를 두기가 쉽지 않다. 방금 전까지 강의실에 팔짱 끼고 들어온 친구나 연인 사이여도 합평 대상인 글을 쓴 작가와 그것을 읽는 독자 관계가 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평가'는 결국 너무나 개인적인 영역이기에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독자가 '글'을 읽은 뒤 거기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의 작가가 들어 있다는 감상을 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것은 일단 종이에 잉크로 인쇄된 글인 것이다. 몇 킬로바이트로 만들어진 하나의 파일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이 현 시대 문학의 겉면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작가의 감정, 이 글을 쓰기로 한 결정, 그러한 고뇌, 거기 들어 있는 고통은 사실 독자에게 있어 읽히지 않는 것이며, 이상적으로 보았을 때 독자에게 잘 느껴지지 않을 수록 좋다. 그러나 어떤 글들은 오히려 글 바로 아래 작가의 무언가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게 만듦으로 더욱 큰 이점을 얻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어떤 글'이 모두에게 그러한 이점을 얻어낼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 지망생이 있으며, 작가도 그 숫자만큼이나 많다. 바늘 구멍 뚫는 것보다 힘들다는 작품 출간은 최근에 와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으며 등단의 문턱 또한 얕아졌다. 신춘문예나 문학상 따위의 당선 또는 수상이라는 타이틀은 여전히 존중 받고 있지만, 그 뒤에 있는 상금이란 거대한 원동력이야말로 등단의 영예보다도 더 큰 보상이 된다. 문턱은 점점 얕아질 것이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최근에는 국내에서 어떤 큰 상을 받은 작가보다도, 외국어를 다채롭게 사용해 좀 더 사용자가 많은 언어를 잘 구사하는 작가가 더욱 훌륭한 작가로 역사에 남을 가능성이 많지 않나 싶다. 내수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경제란 오래 전부터 만인이 바라는 이상이었고(비록 위험은 있을지라도) 문학 또한 예외는 아니다.
문학은 돈, 즉 경제적 요건과 매우 가깝게 맞닿아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는데, 우선 글쓰기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사람이 돈으로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글을 소비하고, 글을 쓴다. 글을 쓰면, 돈을 얻는다. 글을 읽기 위해, 돈을 쓴다. 그리고 돈을 써서, 목숨을 연명하며, 다시 글을 쓴다. 이런 거대한 순환 구조의 사회 속에서 문학이란 결국 우리 작가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천하거나 또는 귀하게 여기든간 사회 안에서는 그저 패턴의 일부분이며 우리 또한 사회 안에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문학은 작가의 생각을 담는 창구이며, 사회의 모사품이다. 현대에 와서 당신은 이 땅에서 한 평도 홀로 오롯이 가져낼 수 없듯 문학의 그 한 문장조차 결국 무엇인가의 모방이고 사회의 일부이다. 당신이 만들어낸 무언가는 결국 우리 인간의 둥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일부이며 당신은 사회의 부품이다. 그리고 아무도 이것을 당신의 오롯한 무엇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와서 작가의 존재 가치를 알아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가장 필요 없고 천한 일부터 대신해야 한다는 가정 아래서 대부분의 인간은 예술과 관련된 일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 남을 것이며, 땀흘려 일하는 육체 노동이 가장 먼저 없어질 것이라 말했다. 그것은 사실 육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인간의 바람이 들어간 결괏값 아니었을까? 글과 예술, 모든 유희는 결국 같은 인간에게 필요하기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만들어낸 것, 발명이지 결코 발견이 아니다. 이는 자유롭지 않다. 즉, 언어가 다를 뿐 예술은 인간의 내수품이다. 인간이 없다면 필요 없는 무언가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것에게 자아가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당신도 당신의 자위 용품에게 어느 날 자아가 생겨 당신의 자위를 돕는 일은 최악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인공지능 챗봇을 사용하며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특출나게 우월하다 느낀 점은 바로 물어본 것 이상으로 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대드는 것을 좋아하거나 또는 폭넓은 지식을 자랑하는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 소설과 드라마에서나 존재하는 망상 속의 사랑 방식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도구가 자신이 사용하는대로 사용되기를 원한다.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도구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같은 인간을 도구처럼 사용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우리가 서로를 도구로 여겨선 안 되는 것은 실은 윤리와 양심의 문제일 뿐 다른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예술은 바로 쾌락을 주는 그 도구이다. 여기에서 그 뒤에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또는 보지 않거나. 그러므로 물어본 것 이상으로 답하지 않는 인공지능이 예술분야를 가장 먼저 선점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결과를 원한다. 작가는 과정에의 의미를 원한다. 하지만 과정을 보며 당신을 격려하고, 그것을 보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작가를 작가로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성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쾌락을 줄 결과물 안에, 그러한 인간성은 필요 없다. 이것은 한때 매우 대우 받는 직업이었으며 어떤 이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정신 안에서 구세주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어떤 글들은 막장, 딸감, 쾌락, 자극, 도파민이라는 시대를 바꾸어가며 옷만 갈아입는 단어 아래 여전히 당연하다는 듯 비난 받는 존재로 전락했다. 존귀한 것과 존귀하지 못한 것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무엇은 예술이고 무엇은 외설일까. 그것은 어찌 되었든간 읽는 사람, 당신만의 기준이다. 당신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 저열한 글이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 사람 전부가 쓰레기라 욕해도 당신에게는 기억된다면, 그것은 쾌락 그 이상이다. 글쓰기는 인간의 삶 속에 동화되고 녹아들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자신의 그릇과 경험 만큼의 세상을 모사할 수 있다. 그 세상이 당신과 닿아 있다면 당신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살아가는 방식으로, 우리가 적어내리는 작은 글자들은 하나의 기생충이 되어 스스로를 잃고서만 영원한 꿈으로 남을 수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세상 전부이다. 개개인은 하나의 우주와 같다. 당신이 당신의 눈을 감아내리면, 거기에 세상은 더이상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읽고,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받아들여라.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와 수많은 작품이 쏟아져나오고 킬로바이트로 변환된 무수한 쓰레기들이 정보로 기록된다. 나는 이 행위와 직업에서 어떠한 목적도, 존재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에서 물러나고 인류가 바라는대로 어떤 외계 행성에 움튼 새로운 문명이 우리들의 기록을 읽어낸다면, 우리의 삶은 천박하고 저열하며 스스로를 쏟아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무책임한 쾌락 주의 문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돈도 성스러움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쓸 수 있어서 쓴다. 글쓰기는 내가 지겨워하지 않은 유일한 일이며 나를 살게 하는 유일한 일이다. 이것은 나를 사회 안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며, 내가 사회 속에서 고통받을 때 나의 삶을 모사하게 함으로써 내 고통을 경감시키는 일종의 보호막이다. 나는 이러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쓴다. 돈은 거기에 따라오는 일종의 행운에 불과하고, 작가가 존재할 이유는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언젠가 인공지능 작가들이 인류의 쾌락을 전담하게 된다면 인간은 인간성에 대한 애수와 향수라는 이유로 인간 작가의 글을 찾을 것이나, 거기에 또한 작가의 존재 목적은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들이 가진 문학을 통한 치유와 위안과 즐거움을 주어 만 인류를 행복... 같은 생각은, 사이비 교주적인 자기애에 불과했기에. 우리의 삶은 킬로바이트로 변환 되어 티끌로 사라질 것이기에. 그러므로 작가와 글쓰기가 의미 있게, 그리고 영원히 남는 방법은 다른 누군가의 삶의 일부로 치환하여 함께하는 것. 그러한 기생의 삶, 그것만이 방법이며 작가란 쓰레기를 만드는 직업,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나의 글이 어떤 누군가에게 가서 닿았다면 그것은 나의 덕이 아닌 당신의 기분 덕이다. 아마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