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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함은 슬픔과 상실감에 대한 방패인 것이다. 이것은 한편 파괴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냉담함은 "절망뿐만 아니라 사랑을 비롯한 다른 정서로부터 자기 자신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체제를 갖고자 한다면 그 해결책은 명백해 보였다. 사적인 삶을 다시 건설하는 수밖에 없다. 나중에 세세한 부분까지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실험으로 증명해 보인 가르침을 지금 스스로가 겪으며 배우고 있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고립은 형벌일 뿐이다. 사회적 생물은 관계와 유대라는 정원에서만 무성하게 자라 꽃을 피울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커다란 정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착 이론에서 명시하는 바와 같이 적어도 하나의 건실하고 기본적인 관계를 필요로 한다.
만일 하나의 관계가 개인을 손상시켰다면, 다른 관계로써 그러한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까?
주로 6개월간 격리되었던 원숭이를 대상으로 이 연구를 진행한 사람은 수오미였다. 격리되었던 원숭이들은 '치료'에 힘입어 정상적인 원숭이의 삶으로 조금씩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 실험으로 누구보다 장기적인 고통을 받은 쪽은 바로 실험자들이었다." 라고 해리는 적고 있다. 이것은 정상적인 사회적 삶을 향해 발버둥치는 원숭이들을 지켜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그가 드물게, 간략하게나마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숭이의 격리 기간이 길어질수록 정상적인 삶에 적응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격리 실험으로부터 얻어진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쓰라린 결론은 사회적 기술은 쓰지 않으면 녹이 슬어버린다는 사실이었다.
원숭이를 1년 동안 격리시켰을 경우 이들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정도로 심하게 비뚤어져 버렸다. 이들은 더 이상 붉은원숭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어느 새끼 원숭이는 처음 연구자가 자신을 안아 올리자 그만 기절해 버렸다. 따뜻하고 살아 있는 접촉은 그에게 견딜 수 없이 두려울 정도로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치료사 원숭이가 격리되었던 원숭이로부터 정상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기까지는 수개월, 때로는 반년 이상이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깃털처럼 가볍게 다가가는 시도를 통해서 격리되었던 원숭이들은 조심스럽게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친구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원숭이들 속에 섞여 있으면 정상적인 원숭이들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갑자기 스트레스르 받거나, 잠시나마 우리 속에 홀로 머물게 되어 고독의 그림자를 느끼게 되는 경우에는 마치 과거의 구렁텅이에 다시 빠지듯 몸을 흔드는 버릇을 보였다.
"우리는 이 동물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떤 행동은 다시 회복될 수 있으며,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잘 회복되기도 합니다. 모든 아이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양육되고 있으며 그중 많은 수의 아이들은 결핍된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발달 체계는 얼마나 견고한가? 우리의 발달 체계는 특정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완충 기능을 갖추고 있는가?"
그러나 감금되기 이전에 사회화를 이미 익혔던 원숭이들은 다른 원숭이와 어떻게 상호 작용 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그것을 원하도록 만드는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절망과 우울로부터 돌아와서 사회에 속하는 능력, 또는 욕구를 재발견해야 했다.
사람간의 관계가 그토록 중요하다는 사실은 우리를 낙담시킵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그토록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혹은 그토록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할로의 연구는 사회적 지지망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개인은 정말 커다란 곤란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병적인 성격이 발달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다른 이들의 애착에 의존한다.
가족 중 누군가 한 사람은 아기에게 전적인 관심을 베풀어야만 한다. 어린 시절의 애착은 종종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다만 우리는 개인의 수준에서, 자신의 아이의 요구에 대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데에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샨버그는 접촉에 대한 강렬한 반응이 여러 종에 걸쳐서 존재하는 원시적 생존 매커니즘을 일깨워 준다고 말했다. (...) 침대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기나, 우리의 한쪽 구석에 바싹 붙어 있는 새끼 원숭이나 곁에서 보기에는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렇게 몸을 움츠리는 행동은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한 작용의 일부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희망과 절망의 묘한 조합이라고 볼 수 있다. 몸을 움츠린 어린 동물은 엄마가 빨리 집으로 와서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사람의 뇌의 회로를 감작시킨다. 특히 스트레스를 주는 경험의 경우에 그러하다. 플로츠키는 "어린 동물은 학습 기계와 같다"고 말한다.
타이처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학대의 결과로 나타나는 스트레스 호르몬과 신경 전달 물질의 격렬한 반응이 뇌의 구조를 미묘하게 변화시켜서 그러한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뇌의 이러한 변화가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변 환경에서 항상 적대감을 보도록 뇌의 회로를 배선시킨다고 보았다.
사랑을 받아야 할뿐만 아니라 사랑 받고 싶다는 요구, 그러나 한편으로 사랑해 줄 사람이 반드시 보장되어 있는것이 아니라는 인간의 조건은 마치 둑에 나 있는 구멍, 갑옷의 작은 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랑의 본질은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내가 상대에게 주기 너무 지친 상황에서도 주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의 사랑에 대한 강조야말로 심리학의 조용한 혁명이 이루어 낸 최상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배우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사랑하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