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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테로 작가들은 왜 퀴어 소설을 쓸까데스노트 2022. 8. 12. 16:40
글을 쓰는 사람인 입장에서 글을 쓰는 일은 몸과 영혼을 파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좆같이 자아가 비대한 작가 집단 옆에서 자신의 좆같은 자아를 조금씩 두드려 깨 부숴가면서 조각조각 팔아 치우는 일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에는 어떻게든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일부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순수문학과 상업문학을 전부 써본 입장으로써 페르소나를 써 자신을 숨긴다는 말도 인정하지만,
실제로 작가를 보면 글로 느낀 어떤 느낌이 그대로 체감될 만큼 글에는 자신이 녹아든다.
글을 쓰다 피곤해지면 더욱 더 손끝으로 빠르게 분량만 채우면서, 자신을 집어넣겠지.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내내 퀴어 소설만 썼던 퀴어로서 나는 헤테로(로 추정되는? 뭐 아무튼 결혼은 했으니 그들을 헤테로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작가들이 왜 퀴어 소설에 한 발 씩을 담그는지 궁금하다
그저 유행하기 때문에 밥숟가락 한 번 얹어보는 것인가?
그놈의 숟가락 타령, 나도 보면 욕할 만큼 싫어하지만
헤테로 작가들이 퀴어 소설을 쓰는 걸 보면 불쾌하다.
왜냐면 그들은 퀴어에 대해 모르고 멍청하기 때문이다.
윤이형의 <루카>를 봐라.
이 소설을 읽게 하고 우리에게 가르친 늙은 교수는 소설이 감동적이라고 했다
퀴어 당사자의 이야기가 아닌, 게이 아들을 둔 개신교 목사 아버지의 입장에서 봤을 때의 그 처절함을 그려냈다고.
지랄떨고 있네. 내 밥도 없는데 아들을 둔 헤테로까지 챙기라고?
그들의 퀴어 문학에는 절실함이 없다.
한마디로 병신같다.
헤테로 작가들이 퀴어 문학에 발을 들이거나 수저 한 번 얹는 일조차 없었으면 한다.
퀴어의 삶은 기본적으로 결여의 삶이다.
생활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무엇의 권리조차 박탈당한 결여의 삶.
평범하게 살아와 평범하게 이성을 사랑하고 평범하게 이성애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성애자가 누릴 권리를 모두 누리는 주제에 이해하는 척 하지 마라.
팔이 떨어지기 전에는 팔이 없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
멀쩡한 여자들이 자궁에 암이 걸려 떼어내 불임인 나의 슬픔과 증오심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듯이.
역겹다.
한국의 페미니즘이 헤테로 여성들을 주력으로 타겟팅하고 있다는 건 레즈비언으로서 슬펐지만 인정했다.
최초의 메갈리아는 마치 남성에게 피해당한 여성들이 피난을 와 서로에게 경험을 이야기하는 놀이터 같았다.
나는 그 복작복작한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뚱뚱한 손을 가진 여자, 레즈비언인 여자, 게이인 남자는 그 사이트에 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도, 어디에도, 어느 페미 사이트, 여시? 무슨 부엉이? 뭐 어쩌구 하는 사이트에도
여자에게 성폭행당한 내가 설 자리는 없었다.
남성에게 도태된 여성인 내가 설 자리도.
불임인 내가 설 자리도.
한국의 여성 <커뮤니티> 에는 좆도 내가 낑겨 있을 만한 자리도 없었다.
어차피 성별엔 큰 염두도 두지 않았는데, 그러자 나는 더 트페미들에게 욕을 먹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젠 헤테로 섹슈얼들이 퀴어들이 몸 팔아 영혼 팔아 쓴 소설의 자리까지 꿰차려고 하고 있다.
웃기지 마라. 현실은 소설이 아니다.
내가 여대 화장실에서 성폭행당했을 때 날 도와준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는 여자를 돕지 않는다.
퀴어도 퀴어를 돕지 않는다.
대신 헤테로는 헤테로를 돕는다.
난 거리 실험 같은 걸 하는 유투버들에게 묻고 싶다.
평범한 남자가 누가 봐도 게이처럼 입은 남자를 때리고 있으면, 어떤 남자가 달려와 막아줄까. 어떤 여자가 다가와 경찰을 불러줄까.
남자처럼 꾸민 여자가 머리가 길고 하이힐을 신은 여자한테 맞고 있으면 어떤 여자가 다가와 막아줄지.
'게이나 레즈비언처럼' 꾸민 사람이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인간에게 무참히 두들겨 맞고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면,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혀를 차며 세상이 말세라고 말할지.
그래서 나는 역겹다고 말하는 거다.
참기 힘들만큼 역겹다고.